“우리 현실 한가운데로 오신 주님.”

* 2017년 8월 13일, 연중19주일(Tenth Sunday after Pentecost)
* 1독서, 창세 37:1-4, 12-28 / 2독서, 로마 10:5-15 / 복음, 마태 14:22-3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허둥지둥하고 있는 모습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사건 바로 앞에는 놀라운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목격하고 동참했던 제자들이 잠깐 마주친 풍랑에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겁에 질려, 물 위를 가로질러 자신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다!”라고 소리 지르죠.

오늘 1독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죠.

우리 함께 3-4절을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 (창세 37:3-4)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야곱은 늦둥이 요셉을 유달리 편애합니다. 그로 인해 어머니가 다른 형들 10명은 요셉을 미워하게 됩니다.

야곱은 ‘그를 위해 야훼께서 싸우신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스라엘’이라 불렸던 신앙의 선조입니다. 그런 야곱인데 많은 부모들이 저지르는 ‘공정하지 못한 편애’라는 잘못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죠. 각각 이스라엘 12지파의 선조로 이름 붙여진 형들 10명은 질투에 눈이 멀어 요셉을 죽이려 계획합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깁니다.

오늘 복음서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 심지어 참여까지 하고도 눈앞에 닥친 어려움에 곧바로 흔들리는 제자들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줍니다.

1독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의 하느님’이라 고백했을 만큼 중요한 선조인 야곱이 보여준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12지파로 이름 붙여진, 야곱이 낳은 10명이 보여준 밑바닥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현실입니다. 위대한 이야기와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할 것만 같은 성서에 담긴 우리 민낯입니다. 부족한 것투성이에 불완전하여 너무 쉽게 흔들리고 금방 밑바닥을 보이는 인물들 모습으로 가득한 게 성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에서 만난 제자들이 그렇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야곱이 그랬으며, 요셉의 형들 10명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툭하면 그렇게 부족함을 드러내고 쉽게 흔들리며 비틀거리는 사람들, 그렇게 너무 자주 바닥을 드러내곤 하는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힘겨워하면서도 또 다시 야훼 이름을 부릅니다.

자신들이 동행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들려준 예수님을 믿고 또 다른 이들에게 증언했습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자신들 모습은 부끄러워할지언정,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 자체는 부끄러워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믿고 전했습니다.

오늘 2독서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우리 같이 읽어 봅시다.

“14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전도자로서 파견 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로마 10:14-15)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오늘날 우리처럼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그 부족함과 불완전함 때문에 너무 자주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이었죠.

오늘 복음 말씀에서 풍랑 가운데 두려워하며 “주님,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나?”는 말씀을 하십니다(30-31).

우리는 이런 주님 말씀을 책망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려워하던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에 ‘함께’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칩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던 원인이 사라진 겁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워 떨던 그 순간에 그들에게 나타난 두려움과 의심, 그 약한 믿음을 직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걸 모른 척하지 않으셨던 거죠.

제자들이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예수께서 우리 바닥에 깊이 고여 있는 두려움과 약한 믿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그런 분이라고 증언하며 전합니다(33).

그렇게 우리 밑바닥을 너무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 우리가 드러내는 현실 속 부족함을 향해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의심과 약한 믿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의심과 약한 믿음, 그 두려움을 주던 원인 한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일상에 닥친 숱한 어려움과 피곤함 때문에 의심이 생겨 신앙생활이 흔들리고, 약한 믿음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 연약한 우리 밑바닥이 드러나는 걸 애써 숨기려하거나 부정하지 마십시오.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모셔올까,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올까’라며 염려하지 마십시오(6-7).

하늘 너머에 있는 일과 죽음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가 감당하거나 애써 해명해야 할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밑바닥에 깊이 고여 있는 부족함과 불완전한 모습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내민 손을 붙드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여러 일들을 함께 물리쳐주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매순간을 살아갈 뿐입니다.

대단하게 여겨지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더럽고 추하며 부족하고 불완전한 우리 밑바닥 한가운데에서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풍랑 바깥에서 우리에게 “바깥으로 나아오라” 하지 않으셨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겪고 있는 그 풍랑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오셔서 우리 두려움을 잔잔하게 하셨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더럽고 추하며 부족한 모습을 애써 포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지고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그런 우리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본기도(Collect)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아,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해방촌에서 이주노동자 식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그 환한 웃음 뒤에 짙게 드리워 있는 힘겨운 한국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성서 말씀을 ‘디딤돌’ 삼아, 우리네 현실 한가운데로 들어와 동행하시는 주님 위로를 나누고자 했습니다.

제게 좋은 성서 해석이란, ‘깊이있는 신학적 안내’ 만큼 ‘현실을 가로질러 살아갈 힘’을 주는 디딤돌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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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8/15 23:51 2017/08/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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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땅의 일부 기독교 신학자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신과 성서를 먼지 쌓인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걸까.

하나의 학문에 고유한 영역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학문들과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학문은 다른 학문들의 진보나 발전에 따라 갱신되어야 한다. 그런 점은 신학도 마찬가지다.

정규 신학 과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한 번쯤 배웠을 거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그 교리를 세우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교부들이나 신학자, 교회 지도자들도 동 시대 학문이나 시대적 성찰과 대화하며 ‘신학적 입장’을 정리했다.

그 말은 그들의 신학적 주장 가운데 많은 부분이 그 시대 학문이나 성찰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교부나 과거 신학자들의 주장 가운데 어떤 부분은, 오늘날 과학이나 의학의 눈으로 보면 황당무계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내세우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럼 점에서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신학만’으로 이야기하겠다는 입장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흔들림 없이 대다수 기독교 교파들이 동의하는 듯한 몇몇 교리에 대한 ‘과거의 신학적 입장’은 더욱 그렇다.

엄연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신학적 입장’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다양한 학문과 시대적 성찰’과 연동되어 정리된 몇몇 성서 해석과 교리에만 기대어 ‘판단’하겠다는 주장을 들을 때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란 생각을 감추기가 어렵다.

의학계나 심리학계에서 왜 ‘취향’과 ‘지향’을 구분해서 말하는지, 정신의학계가 44년 전인 1973년에 전 세계적으로 정신과 진단의 표준을 제시하는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3판’(DSM-III,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III)에서 왜 ‘동성애’를 정신과 진단명에서 뺏는지, 질병이 아닌 동성애는 ‘치료의 대상’이 아닌데 ‘전환치료’를 주장하는 게 왜 문제인지, 오늘날 공중보건계에서는 HIV/AIDS 주요 전파 원인으로 왜 동성애가 아닌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를 지목하고 있는지, 제대로 된 자료를 찾아보거나 알고 있는지 난감할 때가 많다.

그에 대해 주류 학계에서 검증된 자료를 제공하면, 오직 자신들이 내세운 몇몇 ‘기독교인 약사나 변호사, 물리학자’가 정리해준 문구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니, 대체 이런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그가 어떤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정통주의든 근본주의든 보수주의든 개혁주의든 복음주의든 진보주의든 자유주의든, 뭐라고 불리든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다른 의견에 대해 경청하는가’, ‘다른 주장의 근거를 날카롭고 엄밀하게 검증하고 식별하는가’, ‘그 과정 가운데 가능한 예의를 갖춰 소통하며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읽히느냐’가 더 중요한 식별 기준이다.

동성애를 비롯해 다양한 성소수자의 삶에 대해 오늘날의 학문과 시대적 성찰은 계속 갱신되고 있다. 특히 자신들이 다루는 주제가 ‘우리와 함께 숨쉬고 울며 웃는 존재인 사람’에 대한 것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주류 개신교회나 천주교회가 오직 과거의 학문과 성찰에 기댄 ‘어제의 신학’에 기대어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신과 성서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마다, 왜 이 시대의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지 알 수밖에 없다.

신학도 오늘날의 학문과 시대의 성찰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갱신되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자꾸 신과 성서를 먼지 쌓인 과거의 유물로 만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영속시킨 불행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 의학이 동성을 대상 으로 한 성적 지향과 행동을 병리화하는 것을 그만둔 지는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APA 1980).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는 동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지향을 인간 섹슈얼리티의 정상적인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WHO 1992). <유엔인권이사회>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의 인권을 존중한다(2012). 두 주요 진단 및 분류 체계(국제 질병 사인 분류 ICD-10와 DSM-5)에서는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 끌림, 행동, 그리고 성별 정체성이 병리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 2016년 3월, <세계정신의학회(World Psychiatric Association)> 성명서.

“의료인들이 성적 지향과 행동에 대해 편협하지 않은 인식을 가질 때, 건강한 사람에게도 아픈 사람에게도 최적의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동성애를 그 자체로 정신 장애(mental disorder)로 가정하거나 환자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선험적 가정에 근거한 소위 ‘교정 치료(reparative therapy)’ 또는 ‘전환 치료(conversion therapy)’ 사용에 반대한다.”
- ‘Health care needs of homosexual population. AMA policy regarding sexual orientation’, 2010년,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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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8/15 03:47 2017/08/15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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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이 영상을 보더니, 우리가 ‘타락을 옹호’한다고 떠든다.

‘타락’. 오늘날 한국 보수 기독교회는 타락이란 말을 너무 임의적으로 쓴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 안에 소외와 배제, 차별과 혐오가 늘어나는 것이고, 무엇보다 ‘권력 관계에 의한 억압과 착취’가 늘어나는 게 타락이다. 이를 단순 명료하게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신자들이 행하는 ‘성서와 전통의 왜곡’이다.

상대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로 취급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동행하는 걸, 타락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아야 되는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이들이 오히려 타락한 것이다.

그게 성서와 교회 전통의 가르침이다.

* 덧. 이 영상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유’해 주세요. 교회에서 잘못 배운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다는 마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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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7/07/23 04:38 2017/07/23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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