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거의 트윗에서 많은 소통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짧게 논의되었던 부분을 블로그에 남겨 둔다. 더 깊고도 지속적인 토론을 위해서.


믿음의 혼합 샐러드=성공회 / 천주교=질긴 날고기: 적절한 표현!!  RT @skhcafe 리비 퍼브즈, "개종자들은 천주교의 생경함에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 http://goo.gl/X7x8  (영국 타임즈 칼럼 / Elyot 번역)
cras2002, 오늘 19:09 TwitBird (으)로


@cras2002 적절한 표현이라기에는 좀 짓궃지 않나요. 제가 보기에 그 표현은 둘 다 비꼬는 표현 같습니다.
prayandwork, 오늘 19:32 web (으)로

@prayandwork 물론입니다. 비꼬는 말이지요. 그래서 아픈말이고요. 저는 질긴생고기에 싸구려 드레싱을 얹은 밥상을 맛보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생경함의 다른 국면이랄까요? 해법에 대해 고민해봅니다.
cras2002, 오늘 19:37 TwitBird (으)로

@cras2002 신부님께서 둘 다 겪어보셨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종종 샐러드보다 고기가 크게 보이고는 합니다. 그래서 날고기 드셔보신 분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prayandwork, 오늘 19:47 web (으)로


@cras2002 @prayandwork 저는 이 모든 얘기들이 '참고'는 될지언정, 소수파이자 분파 교회로 인식되는 '대한성공회'는 다른 이야기들로 버겨워서 이 얘기들이 '때론' 사치로 여겨지기도 하죠..
my_zacchaeus, 오늘 20:01 Mixero (으)로

@my_zacchaeus @prayandwork 공교회(가톨릭)전통을 가지고도 이를 무시하는 천박함이라 표현하면 지나친건지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 모르면서 없앤것을 돌아보고 반성해야한다고 봅니다. 사치라는 시각은 현상에 대한 판단에서 온게 아닐까요?
cras2002, 오늘 20:15 TwitBird (으)로


@my_zacchaeus @prayandwork @viamedia "사치라는 시각은 현상에 대한 판단에서 온게 아닐까요?"라는 말에 답해야 겠군요. 이건 트윗에서 논하기엔 좀 긴 얘기일 것 같습니다. 허나 트윗의 장점을 이용해 링크하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단순히 현상을 보고 판단하여 말한 건 아닙니다.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내면(본질)'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성공회 신부님(사제, 부제)들을 지켜보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저도 몇일 전부터 성직 칼라를 하게 되어 더 잘 느껴지는 부분이니 이걸로 얘길 풀어볼까 합니다.

(통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년간의 짧은 성공회 생활에서 느껴지는 주관적인 느낌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것이니, 이 점은 미리 양해 바랍니다^^;;)


제가 본 40대 후반~60대의 나이 드신 분들은 외부에 나가실 때 대부분 성직 칼라를 하고 나가시되, 안해나 자녀들과 살가운 모습으로 다니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혹 그렇게 가정적인 분들도 성직 칼라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사복인 경우에 주로 그런 가정적인 면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외부에서 '천주교 신부'로 오해(?)하며 보는 것에 별로 괘념치 않으시거나, 때론 적당히(?)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하십니다. 목사보다는 천주교 신부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다분하십니다. (물론 신학이나 전통으로도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 제가 말하는 건 '경향' 또는 '분위기'를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젊은 사제나 부제가 성직 칼라를 하고 아이를 안고 있거나 안해나 남편과 친밀한 모습을 연출(?)하면 불편해 하시거나 짐짓 점잖은(?) 언행으로 "그런 건 성직 칼라를 하고 하면 안된다"고 조언하시거나 심지어는 꾸짖는 경우도 봤습니다. 이유는 사목자는 누구의 남편이나 안해이기 전에 '사목자'란 논리입니다. (허나 성공회 사목자는 '가정'을 통해서도 '사목의 가르침'을 전하고 받기도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30대에서 40대 중반의 젊은 분들은 어떨까요? 재밌는 건, 이분들 중에 꽤 많은 분들이 교회를 벗어나면 바로 성직칼라를 빼거나 옷을 갈아 입습니다. 왜 일까요? 성직 칼라가 주는 무게감(?)이 부담스럽거나, 또는 공적/사적 영역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일까요?

제가 느끼기엔 천주교 신부(사제, 부제)로 오해받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젊은 분들 가운데는 교회 안에서 아이를 안고 있거나 안해와 정다운 모습으로 있거나 가끔 손을 잡고 다니시는 분들도, (사적인 자리임에도) 윗분들이 계시거나 (성공회) 교회 밖을 나갈 때는 왠지 모르게 움추러드는 걸 느끼곤 했습니다. 


왜일까요? 이건 뭔가 통계를 내고 분석할 것도 없이, 한국에선 종교인이든 일반인이든 우리의 성직 칼라가 '천주교식 복식'이란 인식의 틀이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성공회) 스스로도 탭 칼라를 지칭할 때 '로만 칼라'라는 표현을 스스럼 없이 쓰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이드신 신부님들이든 젊은 신부님들이든 하나 같이 '천주교 복식'이란 기준으로 우리의 복식과 그것을 바라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드신 분들은 성직 칼라를 할 동안은 '철저히' 천주교 신부인 것처럼 가족이 투명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젊은 신부님들은 가족이 투명인간이 되도록 하진 않지만 복식을 착용하는 동안은 무척 조심스럽게 상황에 따라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복식이란 건 '그'를 표현하고 이웃과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기호이자 도구인데, 이 기호와 도구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성공회 사목자의 복식에 있지 않고 천주교 사목자의 복식에 준하여 세워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오래되고 폭넓은 '인식의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니 '올바름'이니를 아무리 말해도 그 순간 뿐인건, 이건 마치 다이어트를 오랫동안 실패한 사람에게 '자주 적게 먹어라!', '일찍 자고 일어나며 지속적인 운동을 해라!', '야식은 절대 먹지 마라!'라고 충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사람들이 '아예 몰라서' 계속 실패하는 것일까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이상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계속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스틱 SITCK!』의 저자가 쓴『스위치 Switch』를 보면 사람이 아닌 상황을 바꿔 그가 현실에서도 '잘할 수 있도록' 해줄 때 비로소 원했던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스위치』의 저자가 말하듯이, 이때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모든 그릇을, 심지어는 물잔마저도 작게 바꾸는 무리없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아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니 일반인들처럼 가족을 가지고 그들과 똑같은 문제와 상황 속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신부로, 먼저 지구인이자 지역민이며 성공회 신자인 성공회 신부로 성직 칼라를 차고서도 스스럼 없이 안해와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아이를 업어주고 안아주는 것에 스스로 검열(?)하지 않아도 되기 위해서 '상황'을 바꿔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전혀 하지 않는 '넥밴드'를 기본 복장으로 하여 다양한 매스미디어를 활용한다거나, 대내외 행사에 자주 드러나는 지도층 신부님들이 사모님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사진이나 영상을 자주 노출한다는지 말입니다. 


제가 왜 "소수파이자 분파 교회로 인식되는 '대한성공회'는 다른 이야기들로 버겨워서 이 얘기들이 '때론' 사치로 여겨지기도 하죠.."라고 말했는지 이제 아시겠나요? 

저는 단순히, 지금 한국에서 성공회가 소수인데, 또는 천주교나 개신교 어느 쪽으로도 연대하지 못하고 애매모호한 분파로 취급 받는데, 무슨 영국이나 미국 성공회가 하는 고민을 하자는 것이냐고 따지는게 아닙니다. 그들의 고민은 조만간 우리의 고민이 될 것이기에 참고해야 함은 분명합니다. 

허나 지금 우리는 120년이란 시간 동안 잘했든 못했든 우리의 선택과 자리매김이 쌓여서, 현재 대한성공회가 '소수'이고 '분파교회'로 인식된 공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우리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그들의 얘기를 참고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거나 '먼 나라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란 걸 말한 겁니다. 

선교사들이 남기고 간 '공교회(가톨릭) 전통'을 무시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이 '식민지에 온 선교사'란 사실 또한 의식하면서 그 전통을 섬세히 가리는 것도 필요하단 말도 첨언하고 싶고요.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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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22:00 2010/07/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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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론

   

1. 요약 및 평가

 

1) 요약

  본 연구자는 이 논문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급증한 도시 슬럼에서 사회적 배제의 대상으로 표류하고 있는 새로운 이산자(離散者)인 도시 빈민들이 슬럼가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오순절-성령운동과 만나, 그들의 삶의 맥락에서 오순절-성령운동을 저항적 ․ 해방적으로 번역/해석하고 있음을 논하고자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번역/해석된 오순절-성령운동이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 선교가 그러했듯이, 어제의 그리스도교를 현대와 새롭게 소통하고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교로 새롭게 갱신시키는 가능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자는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첫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관한 부분이다. 큰 틀에서 1960년 무렵부터 사용된 ‘지구화’ 개념의 맥락에 위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지구화가 가진 양극단의 가능성 가운데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현대사회는 심각한 소외와 배제의 문제, 즉 극단적인 정보와 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점점 가속되는 정보와 부의 집중화와 그로 인해 소외되고 배제된 계층의 비인간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주창한 새로운 자유와 세계화는 결국 ‘자본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었고, 근대 국민국가의 통제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다수의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이자 기본적 인권인 사회권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비정한 심판자로 존재하며 그 약자들끼리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포착하고, 기존의 ‘빈곤’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보완하여 설명하고 대응하고자 나온 개념이 ‘사회적 배제’이다.

 

둘째, 가속되는 지구의 도시화와 슬럼의 급격한 양산, 그리고 사회적 배제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지구의 도시화와 이 가운데 심각하게 양산되고 있는 도시의 슬럼화 현상은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이 연관의 고리 뒤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서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IMF와 세계은행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슬럼화로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도시 빈민들은 사회적 배제의 대상으로 직 ․ 간접적으로 편입되고 있다.

 

셋째, 슬럼이라는 지정학적geopolitical이며 사회 ․ 문화적인 시공간에서 만난 도시 빈민과 오순절-성령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가속된 도시화와 그 가운데 급격하게 형성된 슬럼 그리고 그 한 귀퉁이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박탈당한 채 표류하고 있는 도시 빈민들은, 그곳에서 그러한 비인간적 운명을 비판하고 거부하며 극복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오순절-성령운동을 만났다. 그런데 이 둘은 단순한 만남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둘은 서로의 맥락으로 서로를 끌어들여 새롭게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각 지역의 맥락에서 사회적 배제에 대한 비판이나 거부 또는 극복이라는 대응으로 나타났지만, 하나의 틀로 규정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양상으로 각 지역의 맥락에서 변화되어 갔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실례로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 자료를 인용하여, 남미 도시 빈민들의 삶의 맥락과 만나 서로 변화된 오순절-성령운동,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여성들의 급진적인 해방의 통로로 서로 작용한 오순절-성령운동, 자신들의 지정학적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인 맥락과 오순절-성령운동을 만나게 하여 새로운 생태적 ․ 우주적 차원의 운동으로 승화시켜가고 있는 아프리카 AICs의 오순절-성령운동, 50년대 남북전쟁이후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소외와 배제 그리고 문화적 표류 속에서 절망하던 이들과 만나 서로 변화된 한국의 오순절-성령운동을 제시했다.

 

넷째로 슬럼이라는 지정학적geopolitical이며 사회 ․ 문화적인 시공간에서 만나 서로 소통하며 서로를 변화시킨 도시 빈민과 오순절-성령운동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설명했다. 본 연구자는 이 상호작용이 바로, 앤드류 윌스의 “선교를 통한 그리스도의 복음 변화”와 라민 싸네의 “번역에 의한 선교” 개념에 해당하는 번역/해석의 과정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오순절-성령운동이 갖는 특성상, 이 운동이 도시 빈민들을 만나 소통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번역/해석의 과정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포섭되어 버린 현대사회 속 사회적 배제의 대상인 다수의 약자와 소통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저항적 ․ 해방적 운동이 될 수 있음을 논하였다.

다만 이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으로, 사회적 배제의 현장에서 시작되어 자라온 오순절-성령운동이 앞으로 더욱 저항적․해방적 힘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저항적 ․ 해방적’인 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불어 주장했다.

 

2) 평가

  본 연구자는 위와 같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사회적 배제의 현장에서 새롭게 번역/해석되는 성령의 가능성을 논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 탈(脫)식민주의post-Colonialism 시대에 사회적 배제의 대상인 도시 빈민들과 더불어 저항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오순절-성령운동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의의(意義)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이 논문을 논하는 자료구성과 분석에 있어서 그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사회적 배제의 현장’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이 사회적 현상의 자리에 자리 잡은 도시 빈민의 사회적 배제라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곳에 자리 잡고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오순절-성령운동이라는 종교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이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배제의 현장에서 새롭게 번역/해석되는 ‘성령’이라는 해석학적 분석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사용된 자료들과 그 분석에 있어서, 먼저는 연구자의 사회학적 훈련이나 해석학적 훈련이 일천(日淺)하고 매우 부족하고, 둘째는 그 자료들 또한 이 논문의 주제만을 위해 조사되고 구성된 자료가 아니기에, 그 구성과 분석에 있어서 엄밀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새롭게 번역/해석되는 성령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사회적 배제의 현장인 도시 빈민들의 표류하는 삶과 만나 저항적 ․ 해방적 운동으로 새롭게 번역/해석되는 오순절-성령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을 조명하느라, 그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뤘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적 성찰도 부족한 감이 크다. 다만 위와 같은 한계들은 연구자의 능력 부족과 부족한 지면으로 인해 추후에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2. 마무리하며.

 

어떻게 하면 이 세계에 ‘입장’(入場)과 ‘소속’(所屬)을 허용 받을까 … ‘나 같은 인간이 과연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허용 받을 수 있을까?’ 즉, ‘입장권’, ‘소속권’이 주어질 것인가 하는 불안이다.

 

이 글은 한 ‘재일한국인’이자 작가의 고백이다. 그는 자기 평생의 불안의 이유를 어느 쪽에도 소속될 수 없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처지 때문임을, 죽기 2년 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40년이 지나가던 때 고백한다. 그에게는 분명한 ‘입장권’, ‘소속을 알려주는 증명서’가 간절히 필요했다.

이 논문에서 초점을 맞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슬럼에서 표류중인 도시 빈민들 또한 그렇게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났고, 자․타의에 의해 옮긴 삶의 터전과 시간들 속에서도 끊임없이 배제되고 이방인 취급을 받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와 일터와 노동과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된, 그래서 늘 어딘가 ‘소속’되고 ‘새로운 영토’로 ‘입장’하기를 간절히 구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도시 빈민들은 오랫동안 누군가에 의해 전유appropriation당하고, 누군가에 의해 재현representation당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자신들의 ‘소망’과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목소리’와 ‘삶’으로부터도 소외당했다.

이런 이들에게, 오늘날 각 지역적 맥락과 사회적 배제의 현장에서 함께해온 오순절-성령운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동행해 왔다. 여성신학자인 이숙진은 가부장적 헤게모니가 강력하게 작동한 한국 개신교 종교권력의 힘 아래 ‘미신성, 몰(沒)역사성, 반(反)지성’이라는 부정적 표상으로 왜곡되어온 오순절-성령운동에서 오히려 가부장적 권력에 균열을 가할 수 있는 저항의 지점들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가부장적 구조에서 소외되고 주변화 되었던 여성들이 성령운동이라고 하는 역동적인 장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주체로 부상하면서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읽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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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0/03/16 02:20 2010/03/1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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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회적 배제의 현장에서 새롭게 번역/해석되는 성령

 

1) 선교의 텍스트로 번역/해석되는 오순절-성령운동

 

“어원학적으로 보면 ‘번역(飜譯), translation'은 라틴어 접두사인 trans( ~넘어서, ~을 초월하여, ~을 전체적으로 관통하여) + ducere(이끌고 가다, 운반하다, 옮겨놓다)의 결합”이라고 한다. 이를 윤성우는 “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다른 언어로 의미를 옮겨놓는 일이 번역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번역’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다른 문화와 언어의 사태와 상황을 이해하게 하는 ‘의미의 해석’”이기에 이런 점에서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와 연결시켜주고 매개해주는 탁월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정의한다.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그 언어를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듯이, 다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문화와 그 문화가 발효되어 있는 종교를 이해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교가 “교회가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다른 것과 만나는 것”이기에, 선교란 순드클러B. Sundkler의 말처럼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계를 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라민 싸네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문화를 선포의 참된 최후의 전거로” 삼아 문화적 배제를 하지 않는 “번역에 의한 선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역으로서의 선교는 복음을 수용하는 문화가 하느님의 구속 약속의 진정한 목적지”이며 “번역을 통해 선포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교’”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어떤 한 문화만을 신격화하는 경향을 억제”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번역에 의한 선교’는 “필연적으로 획일성과 중심화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 “새로운 매체가 우리에게 또 다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번역에 의한 선교’에서 메시지는 항상 “만남의 상태”에 놓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견해는 김상근이 정리한 앤드류 윌스의 4가지 선교학적 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앤드류 윌스의 세 번째 선교학적 관점이 “선교현장에서 발생하는 회심conversion에 관한 것”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과거로부터의 완벽한 단절을 수반하는 새로운 신앙체계로의 방향 전환”으로의 회심에 대해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앤드류 윌스는 “정반대의 회심과정”에 대해 언급하며, “선교사가 어느 오지(奧地)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느님의 은혜를 선포했을 때 회심하는 개종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신(神)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회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그리스도교에서 “독특한 문화적 표현과 다양한 종교적 체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앤드류 윌스의 선교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모든 선교는 번역의 작업에서 출발”하고 이는 “성육신적 선교Incarnational Mission”가 모범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복음의 내용이 “현지어가 가지고 있는 언어 문화적 지배력에 의해 새로 번역된 언어의 문화적 틀에 의해 복음의 새로운 측면이 드러”나고 “그 궁극적인 의미들”이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교사들의 번역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변화된 복음의 새로운 모습과 해석까지 포함한 “선교 번역을 통한 그리스도교 복음의 변화Transformation of Christianity through missionary translation”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상근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었던 한국적 복음”,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문화와 언어로 번역된 “한국화”된 복음이 있는 것처럼, 다른 선교 현장에서도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로 그 내용이 새롭게 번역된 “자신들의 복음”이 발견되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선교적 사명’일 것이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오순절-성령운동이 바로 이처럼, 각 나라의 문화와 언어 속에서 새롭게 번역/해석되어 왔다. 그리고 그 문화와 언어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오순절-성령운동으로 변화되고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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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캐오

2010/03/16 02:14 2010/03/1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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