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그가 그 나라를 앞세워 우리에게 오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저는 오늘 1독서인 이사야서를 읽다가, 오래 전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읊던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한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습관적으로 흥얼거릴 뿐인 흘러간 옛 노래와 같은 시를 하나 읊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읊었던 그 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볼까요.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6-19)

네, 그렇습니다. 운율이 있는 시로 기록된 이사야서 61장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 말씀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기억하던 이사야가 남긴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는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려는 예수께서 이 부분을 직접 펼쳐 읽으신 것으로 기억하며 기록하여 전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예수께서 최소한 이사야 선지자만큼 위대한 예언자이거나 그 이상의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노래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시 구절이 이 땅에 실현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애달프게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시 구절 속에 묘사된 그런 나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 노래가 이뤄질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리어진 그 노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계속 불리며 전해져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사야의 노래를 예수께서 다시 펼쳐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만 할 뿐 더 이상 어떤 생명력이나 기대도 없이 죽은 듯 깊이 잠들어 있던 그 노래는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그러니깐 ‘삶의 절대적인 좌표이자 지향’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 노래는 다시 해석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사야의 시대가 변화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언되고 불렸던 노래는, 예수의 시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다시 불리고 또 다른 이야기로 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는 그렇게 흘러흘러 이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도 전해져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도 그 시를 흘러간 옛 노래처럼 아무 설렘이나 기대 없이 습관적으로 부를 뿐입니다.

오늘 2독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가운데 한 부분은 마치 그런 우리에게 보낸 편지와도 같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봅시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1데살 5:16-20)

어느새 우리 안에 가득한 패배감과 실망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늘 비슷한 불의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점점 냉소와 무감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한 부분을 펼쳐 있던 당시도 흘러간 옛 노래와 같던 그 시는 사람들에게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이었습니다.

가득한 패배감과 실망, 냉소와 무감각은 그 노래를 듣고도 아무 감흥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시 구절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리란 떨림이나 설렘 같은 건 아예 없었습니다.

곧 이뤄지거나, 조만간 이뤄지리라는 기대 또한 없었습니다. 그저 듣기 좋은 흘러간 옛 노래정도로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주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시 부르는 그 옛 노래가 증언하는 그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뤄주실 분이십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불러주신 분은 진실하셔서 이 일을 다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1데살 5:23-24)

이처럼 흘러간 옛 노래와 같은 시를 설렘과 떨림으로 기대하는 사람을 오늘 2독서인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23절에서는 “온전히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온전한 사람이란 오늘 복음서가 기록하여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 1:7-8)

세례자 요한이 그랬듯이 우리가 증언할 단 하나의 빛인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씨가 움트듯이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노래를 넘쳐흐르게 하실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이사 61:10b-11)

우리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나라를 앞세워 우리에게 오실 분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우리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구약’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 오래 전부터 노래되던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미묘하게 대비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옛 노래를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는 은총은, 그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온전하게 이뤄지는 관계와 다스림 속에서 살게 되는 은총을 뜻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다스림과 섬김을 맛보고 마주하는 은총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다스림과 섬김에 동참하게 될 날을 기대케 하는 은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빛 자체이신’ 아들은 창조의 방식대로 ‘빛나십니다’. 그리고 피조물은 빛에 참여함으로써 빛나고, 그리하여 ‘빛’이라 불리며 ‘빛’이 됩니다 ... 참으로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본성상 작고 비천한 이들을 위대하고 훌륭하게 만드셔서 자신들에 대한 그분의 선의에 감탄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당신이 가지신 것을 아낌없이 주시어 우리를 아름답게 꾸며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신들’이라고, ‘빛’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는 이름 가운데 좋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 복음 주해>1,9.,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Ⅴ>, 106-107쪽

대림 3주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기쁨으로 성탄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1독서, 이사야 61:1-4, 8-11 / 2독서, 1데살 5:16-24 / 복음, 요한 1:6-8, 19-28

* 2017년 12월 17일, 대림 3주일(Third Sunday of Advent)

——————

‘오랜 교회의 이야기와 증언’을 오늘에 맞춰 재구성하여 해설하는 게 전례적 설교라고 생각하며 준비하지만, 늘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대림절기를 맞이하는 이유를 곱씹으며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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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 03:20 2017/12/2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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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유명한 말. 그런데 이쪽 동네에서 일할 때마다 자주 부딪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명분도 좋고 총론도 좋은데, 각론(디테일)에 들어가면 갑자기 상황이 묘~해진다.
목표와 방향이 좋더라도 구체적인 시간표와 전략, 그에 따른 실행 방안이 세워지고 집행 과정마다 이행 상황 체크가 이뤄지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군다나, 그 많은 일들을 ‘누가 할 것인가’에 오면 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아, 그 일은 OOO가 잘해요. 제가 시킬게요.”

“아, 그 일은 OOO가 늘 봉사했었어요.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제가 한 번 더 부탁할게요.”

당사자의 자발성이 없는데, 툭~ 던지듯이 일이 맡겨질 때가 많다. 아무리 명분과 방향이 좋더라도,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에게 일을 부탁하면서 ‘선의’를 들먹거릴 때가 자주 있다.

악마는 디테일이 있다. 이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대의명분에서 ‘선의로 넘쳐나는 사람들’도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일과 관계의 원칙이다.

그토록 강조하는 자발성이란 ‘알아서 기어라’는 신호가 아니다. 그건 ‘잘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짐을 나눠지겠다는 뜻이다.

적절한 비용 지불을 할 생각이 없다면, 적절한 결과물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인풋(input)한 만큼 아웃풋(output)이 나오는 걸 ‘결과’라고 부른다. 인풋한 것보다 더 많은 아웃풋을 요구하면 보통 ‘착취’라고 부른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능력 이상을 갖춘 천재’인 경우를 빼고 말이다.

아, 그런데 천재가 왜 그 정도 대우를 받으며 여기서 일을 하겠는가. 그럴 일 따위는 없다.

그러니, 이럴 땐 그냥 외우자. 당신에게 대의명분만 있고 디테일에 힘쓰거나 위임할 깜냥이 없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악마가 될 수 있다. 디테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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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04:03 2017/12/21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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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아니라, 낙태죄가 문제입니다.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많은 생명윤리 관련 연구자, 철학, 신학 연구자와 현장 활동가들이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작은 힘이지만 저도 동참했습니다.

여성의 몸은 통제 대상이 아닙니다. 현재의 낙태죄는 그저 국가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법으로 ‘낙태의 고통과 무게’를 여성에게만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임신중단권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낙태죄 폐지를 ‘비윤리적∙비종교적 선택’이라 꾸짖는 듯한 일부 종교계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히’ 다 알고 있다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특히 종교계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더 많이 듣고 배워야 합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런 선택이 여성들을 얼마나 힘겹게 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낙태죄 폐지와 임신중단권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성명서를 널리 공유해 주십시오. ‘생명이냐, 선택이냐’는 단순화시킨 구도 너머에 여성의 많은 고통과 무게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여성이 아니라, 낙태죄가 문제입니다.

——————

(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 성명서 전문 )
“낙태 반대만이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윤리 관련 연구자로서 낙태죄의 폐지에 찬성한다.”
2017년 9월 30일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는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이후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뜨겁다. 이 청원은 한 달 새 23만여 시민들의 지지를 모을 만큼 주목을 받았으나 일부 종교계를 비롯한 반대의 목소리도 그만큼 높았다. 우리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는 낙태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이번 기회에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이 내려지기를 소망한다.
이미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과거의 엄격한 낙태 규제법을 다양한 규정과 제도를 가지고 대체해 왔던 반면, 우리나라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의 낙태 금지조항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73년 정부 주도 가족계획 정책의 일환으로 몇몇 제한된 경우에 한해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규정을 모자보건법에 두기는 하였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여 대부분의 낙태시술이 불법으로 규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현실과 법의 괴리는 당사자인 여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의료인의 전문직 윤리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실, 생명윤리학계에서는 서구에서 등장한 다양한 이론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과 사상에 입각하여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낙태에 대해 전향적인 견해를 표명해 왔다.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뜨거운 낙태죄 폐지 요구에 대하여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생명윤리론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 또한 하나의 학문적 견해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낙태가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이를 국가의 법률 조항에 넣어서 모든 낙태를 일괄적으로 규제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주장이 전체 생명윤리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시작된 변화의 흐름이 행여 꺾인다면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국가가 법률로써 낙태를 일률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생명윤리학의 주된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마이클 샌델을 포함한 유수한 생명윤리학자들이 낙태의 윤리적 정당성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들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생명윤리학자들 중에서도 국가가 낙태를 법률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론 낙태죄 폐지 주장이 곧 모든 낙태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며, 우리들 내부에서도 낙태에 대한 윤리적 입장은 매우 다양하다. 다만 이미 낙태를 통해 충분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을 형법으로 단죄하여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으며, 이는 여성에게만 가혹한 불공정한 일이고, 또 낙태를 불법으로 단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는 데 모두 동의할 뿐이다.
우리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는 그동안 낙태에 대한 다양한 윤리적 담론들을 공론의 장에 풍부하게 제공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며, 이제라도 다양한 견해와 주장들을 연구하고 논의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이를 통해 낙태와 관련된 사회적 논의가 보다 성숙해지고, 나아가 제도적인 개선의 결실로 이어져, 이로 인해 커다란 심신의 고통을 겪은 수많은 여성들이 처벌의 공포와 죄의식이라는 이중 삼중의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
<서명자 명단 : 가나다 순>
강명신(강릉원주대 교수, 철학/생명윤리학)
강 철(연세대 강사, 철학/생명윤리학)
강호숙(기독교인문학연구소 연구위원, 신학)
고윤석(울산의대 교수, 중환자의학/의료윤리학)
공미혜(신라대 교수, 여성학)
곽분이(한국여신학자협의회 실행위원, 신학)
권복규(이화의대 교수, 의료윤리학)
권수현(경상대학교 선임연구원, 정치학)
권혁범(대전대 교수, 정치외교학)
김김혜영(충남대 박사 과정, 사회학)
김도경(동아의대 교수, 의료윤리학)
김미주(울산과학대 교수, 사회복지학)
김병수(성공회대 교수, 과학기술학)
김세원(한국외대 강사, 철학)
김수아(서울대 강의교수, 언론정보학)
김수연(이화여대 강사, 신학)
김수정(동아대 교수, 사회복지학)
김신미(창원대 교수, 간호학/간호윤리학)
김애령(이화여대 교수, 철학)
김애영(한신대 교수, 신학)
김엘리(연세대 강사, 여성학)
김유경(가야대 교수, 언어치료학)
김은규(성공회대 교수, 신학)
김은애(이화여대 연구교수, 법학)
김인옥(장로회신학대학 교수, 신학)
김정내(충북대학교 전문상담원, 교육학)
김정준(성공회대 연구교수, 신학)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신학)
김태연(이화여대 HK연구원, 신학)
김택중(인제의대 교수, 인문사회의학/의사학)
김현미(연세대 교수, 문화인류학)
김혜령(이화여대 교수, 신학)
김혜원(한국여신학자협의회 실행위원, 신학)
김화경(경기대 교수, 철학)
남순예(충남대 교수, 철학)
류화신(충북대 교수, 법학)
모효정(국립의료원 연구원, 생명윤리학)
문재영(충남의대 교수, 중환자의학/의료윤리학)
민경식(연세대 교수, 신학)
민김종훈(용산나눔의집 원장, 신학)
박경미(이화여대 교수, 신학)
박두진(가야대 교수, 물리치료학)
박민미(동국대 강사, 철학)
박소연(경희의대 교수, 내과학/의료윤리학)
박숭인(협성대 교수, 신학)
박우석(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철학)
박인지(가야대 교수, 안경광학)
박일준(감리교신학대 강사, 신학)
박지은(이화여대 강사, 신학)
방영미(가톨릭대 박사수료, 종교학)
배은경(서울대 교수, 사회학)
배현아(이화여대 교수, 의료법)
백소영(이화여대 강사, 신학)
백영경(방송통신대 교수, 의료인류학)
성지혜(대구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 여성학)
손지아(가야대 교수, 사회복지학)
송다영(인천대 교수, 사회복지학)
송진순(이화여대 강사, 신학)
신 선(한국여신학자협의회 실행위원, 신학)
신경아(한림대 교수, 사회학)
신익상(성공회대 연구교수, 신학)
신하영(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 교육학)
심지원(인제대 연구교수, 생명윤리학)
안덕선(고려의대 교수, 의학교육학/생명윤리학)
양광모(삼성서울병원 교수, 의학)
연희원(서경대 강사, 철학)
오애리(상생과상상의인권공동체 공동대표, 사회학)
오연재(한림대 교수, 간호윤리학/생명윤리학)
유상호(한양의대 교수, 의료윤리학)
유소영(서울아산병원 특수전문교수, 생명윤리학)
유수정(경희의대연구교수, 생명윤리학)
유연희(감리교신학대 강사, 신학)
윤구현(간사랑동우회 대표, 사회복지학)
윤김지영(건국대 교수, 철학)
윤지선(중앙대 강사, 철학)
윤현배(서울의대 연구교수, 의학교육학)
이국봉(중국상해교통대 교수, 정치철학)
이나영(중앙대 교수, 사회학)
이숙진(이화여대 강사, 신학)
이안나(부산대 전임연구원, 사회학)
이영미(한신대 교수, 신학)
이원심(계명대 강사, 여성학/철학)
이은선(세종대 교수, 신학)
이은애(이화여대 강사, 신학)
이은주(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 신학)
이인경(계명대 교수, 신학)
이일학(연세의대 교수, 의료윤리학)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철학)
이주아(이화여대 강사, 신학)
이찬수(서울대 HK, 종교학)
이현숙(상생과 상상의 인권공동체 사무국장, 사회복지학)
이현재(서울시립대 교수, 철학)
이현정(서울대 교수, 의료인류학)
임소연(서울대 강사, 과학사/과학철학)
임종수(성균관대 연구교수, 철학)
임현진(이화여대 강사, 신학)
정미현(연세대 교수/교목, 신학)
정세근(충북대 교수, 철학)
정신희(이화여대 강사, 여성학)
정희성(이화여대 교수, 신학)
조윤호(전남대 교수, 철학)
채현숙(유쾌한가족과성상담소 소장, 여성복지)
최규진(인하의대 교수, 인문의학/의료윤리학)
최보문(가톨릭의대 명예교수, 정신과/의료윤리학)
최순양(이화여대 강사, 신학)
최은경(서울대병원 연구교수, 인문의학)
최정희(진해 여성의 전화 대표)
최 훈(강원대 교수, 철학/윤리학)
추정완(목포대 교수, 윤리교육학)
한경희(서울대 박사수료, 국문학)
허라금(이화여대 교수, 여성학/철학)
허유선(동국대 강사, 철학/생명윤리학)
홍기훈(가야대 교수, 작업치료학)
홍찬숙(서울대 책임연구원, 사회학)
황승식(서울의대 교수, 예방의학)

——————

[중앙일보]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들 “낙태죄 폐지 찬성” 입장 표명
김선영 기자 | 수정 2017.12.14 17:07

[청년의사] “낙태 반대만이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것 아냐”
- 생명윤리관련 연구자연대, 낙태죄 페지 찬성 성명서 발표
이민주 기자 | 승인 2017.12.1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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